2개에서 그쳐야 할 알파벳
권력형 성폭력 사건 저항과 연대방식
편집자 우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적극적으로 전개되던 반(反)성폭력 자치규약 운동이 점차 자리를 잡아갈 무렵, 제17대 총여학생회는 ‘그녀들의 외람된 수업만들기’라는 자료집을 제작하며 강의 중 성차별/성폭력 발언 사례를 수집 및 정리하였다. 이 책자의 사례에는 가부장적인 결혼제도에 대한 강조, 임신/출산 등 여성의 경험에 대한 비하,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발언, 이성애중심주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주1). 교수가 가해자인 권력형 성폭력 사건은 1993년 서울대 신정휴 교수 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작성하는 순간에도 자료집의 사례들이 오래된 과거의 온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익숙한 기시감에 과거와 현재가 융합한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2019년 9월 19일,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의 전공수업인 <발전사회학>의 강의를 맡고 있던 류석춘은 ‘위안부는 매춘이다’, ‘궁금하면 한번 해볼래요?’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와 해당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한테 동시에 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에 사회학과 학생회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사건 학생대책위원회’(이하 류석춘 대책위)를 발족하고 류석춘의 사과와 파면을 요구하며 대응을 이어갔다.
류석춘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맞춰 따라가기 전에, 학교 내에서 연속적으로, 혹은 연쇄적으로 끊이지 않았던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017년 3월(주2), 문과대 A교수가 수업 및 뒤풀이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학생에게 성폭력(성희롱)을 가했다는 사실이 공론화되었다. 다수의 피해 학생들은 ‘피해 여학생 모임’을 조직하고 학과 간담회, 입장문, 교내 윤리인권위원회를 통해 처벌과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은 부진했다. 그 와중에 제29대 총여학생회 ‘모음’은 <문과대학 A교수 사건 해결 촉구를 위한 연서명>을 받으며 힘을 보탰다(주3). 그리고 17개월 만에 교내의 교원징계위원회가 징계조치를 발표하였는데, 그 수위는 고작 ‘정직 1개월’이었다(주4).
<사진 2>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본관 앞 B대위 입장문
출처: 우무 개인사진
이제 다시 류석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류석춘은 과연 몇 개월의 징계를 받았을까? 2020년 5월, 학교 본부에서 류석춘에게 내린 처분은 정직 1개월이었다. 류석춘 대책위는 활동 당시 ‘B대위’라고 호명되기를 원하였는데, 류석춘 대책위의 입장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주5).
우리가 류석춘 교수를 B교수로 명명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B교수 이후의 C교수, D교수가 없을 학교를 원한다. 류교수 대책위는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A교수 사건'과 'A교수의 책임 회피', '해당 사건에 대한 학교 본부의 솜방망이 처벌'을 똑똑히 기억한다. A교수로도 모자라 B교수를 만들어낸 학교 본부가 C교수, D교수를 만들어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번에는 기필코 위계로부터 비롯한 폭력과 이를 용인하는 낡은 관념을 근절해야 한다.
우리는 B교수를 비(非)교수라고 부르겠다. 교수-학생 간 권력관계를 인정하고 사과해도 모자랄 시간에 '사과하라는 요구를 검토는 해보겠다. 그러나 그런 의도도 아니었고 하지도 않은 일에 사과하게 되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며 계속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자를 과연 교수라고 부를 수 있는가? 류교수 대책위는 본인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 그를 교수로 인정할 수 없다.
‘안전한 강의실’과 ‘안녕한 교육권’을 위해 류교수 대책위는 끝까지 외치겠다. 외침의 끝에는 류교수의 사과와 파면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러한 류석춘 대책위의 선언이 무색하게도, 학교 본부는 A교수와 마찬가지의 징계를 B교수에게 내렸다. A교수의 사건이 있은 후 2년이 지나 B교수의 사건이 있었다. 그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학교 본부의 인식과 의지는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류석춘 대책위는 지속해서 집회와 릴레이 발언을 이어감과 동시에 ‘연세대학교 또한 류석춘의 공범이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해당 문제를 진정 해결하고자 했다면 연세대학교는 문과대 A교수와 동일한 징계 수위를 내려서는 안 되었다. 류석춘 교수가 학생들을 향한 2차가해를 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대학교는 문제 상황의 진단 및 예방, 그리고 학생들을 보호해야만 하는 마땅한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연세대학교는 본 의무를 저버렸다. 학생대책위는 류석춘 교수 사건과 같은 연속적인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후 권력형 성폭력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안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으로서 학생대책위는, 권력형 성폭력 해결 과정에 학생 참여를 보장하는 연석협의체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바이다.
1993년부터 2024년까지, 학교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순간을 관통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은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1993년의 신정휴 교수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 관련 학칙 제정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2000년대 이르러 반성폭력 자치규약이 학내에 공고히 자리잡았다.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반성폭력 규약 및 학칙은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때는 크게 드러나고, 어떤 때는 숨겨지기도 하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아직도 학교 안에서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가부장제와 권위주의가 만연한 학내 공간에서 정의로운 여성주의가 실현되기에 약속과 규약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류석춘 대책위원회에서는 권력형 성폭력 해결 과정에 학생 참여를 보장하는 ‘연석협의체'를 제안했다.
그럼에도 희망하고 싶다. 90년대부터 이어져 온 반성폭력 운동은 점진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고. 반성폭력 자치규약은 그 당시의 현재와 감응하여 성평등이라는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반응의 정도를 낮춘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이 제정된 지 20년이 지나가는 이 시점, 그 의미가 이전만큼 강력한 규제의 힘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여성주의자들은 새로운 반응을 일으킬 촉매를 상상해야 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언제나 가능성을 상상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제 우리, C교수의 가능성을 막연히 걱정하는 것보다 변혁할 수 있는 제도를 바탕으로 C 교수를 예방하는 공동체를 상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