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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여

“이들은 더 이상 학교나 학생회라는 기존의 제도에 머무르지 않고 물리적 공간과 이념적 조직을 넘나들며 다른 페미니스트 주체들과 조우하고 연대하고 있다. 한국 대학 여성운동을 역사화한다는 것은 운동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

 

현재 대학 내에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을 단순히 생물학적 남녀 간 대립이나 갈등으로 곡해하는 방식은, 대학을 젠더권력의 기제로서 상정하고 투쟁해온 오랜 여성들의 역사를 소거하거나 폄훼하기에 문제적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과거 운동의 성과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운동의 굴절된 결과들이 현재의 기회구조 하에서 어떻게 운동의 지형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이다. 이를 통해 곧 현재가 될 미래의 우리 운동을 다시 상상해 보는 일이 시급하다.

 

(정다울, 이나영, 2020)(주1)​

주1) 정다울, 이나영. (2020). 대학 여성운동을 역사화하기: 대학 사회 및 한국 여성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28(1), 120-173.

​사라지더라도, 살아지던가요?

편집자 망고🥭

연세대학교 마지막 총여학생회

활동에 대한 회고

이 웹진에 수록된 원고들을 읽어내려온 당신에게, 필진이 기록하고자 한 학내의 여성사가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역사’에 수렴되는 모습이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총여학생회의 역사가 실제로 그 모든 맥락과 관계맺고 있는 가장 무거운 코어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 코어가 지금 우리의 무게중심이 되어줄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더 분명히 적고 싶다.

 

그래.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학생사회의 위기담론 전반, 일련의 사건·사고 및 현상으로서의 백래시, 그로 인해 더 이상 ‘예전같지 않은 지금’에 대하여 이제 와서 말문을 트기에는 제대로 뒷북이 되어, 이미 그러한 종류의 한탄에 질린 새로운 시대의 일꾼들이 하나 둘 모여 새로운 색깔의 풍선을 무더기로 불어올리는 중에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2018년 말부터 2019년까지, 장장 8개월 남짓 이어진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회칙 상 삭제’에 관련한 역사를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으로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좋든 나쁘든 당시의 기억이 머릿속에 뿌리박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아무리 분통스러운 마음을 토해내도 못내 부족한 암흑기일 수도, 위키 문서의 링크를 복사해 전달하면 끝인 무용담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일생 다시는 언급하고 싶지 않은 금기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또 누군가에게는, 주로 온라인 공간으로 대표되는 2019년 이후의 학내 여론에서 적극적으로 오염되어 부유하는 역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고정시키고픈 의지가 있었다. 사라지는 여女론, 즉 서울권 대학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총여학생회 사라짐’의 바람을 이제 와서 독자적으로 기록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이미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이 많으므로 이곳에 일부를 모아둔다. 특히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창간호, 「백래시」 에 수록된 ‘총여학생회 폐지에 관한 소고’ 시리즈가 각 대학 총여학생회의 폐지 과정에 대한 아카이브와 그에 대한 세심하고 정확한 고찰을 담고 있으니 일독을 권장한다.

 

💬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총여학생회 폐지에 대한 고’ 시리​즈

“실제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학내에서 얼마나 인지되었는지는 확인할 순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허용되었고, 이익집단의 요구를 위해 정치적 수사들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 연세대학교 교지, 연세지 117호 중 ‘2018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사태를 말하다

“다시 말해, 소수자는 애초에 ‘보편’ 혹은 ‘모든 인간’의 범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그 허울 좋은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보편 인권’만으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없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한다.”

💬 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 146호 중 ‘총여학생회, 그 사라짐의 기록

“총여학생회(이하 '총여')가 생긴 이래, 총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총여학생회 폐지 주장은 대개 200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다. '김치녀', '된장녀', '취집'과 같은 단어가 인터넷을 뒤덮었고, '이제는 성평등 사회가 아니라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는 사회'라며 총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대학 안팎에서 퍼져 나왔기 때문이다.”

 

💬 여성신문, “서울 내 대학 총여학생회 ‘전멸’...페미니즘 활동 어디로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폐지가 결정되면서 서울 소재 대학 내에서 총여학생회의 활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지난해 성균관대·동국대 총여학생회 폐지 흐름이 이어진 것이다. 성평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한국사회 전면에 등장했지만 대학사회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가는 양상이다.”

 

💬 연세춘추, “마침표 찍은 총여학생회, 후속기구는 '물음표’

“한편 성폭력담당위원회가 총여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고려대 성평등센터 노정민 전문상담원 역시 총여 후속기구가 성폭력 사건 처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노 전문상담원은 “사후 대처만이 아닌 사건을 예방하는 역할, 즉 대학사회 내에 성평등한 문화를 정착하는 사업을 총여의 대체기구가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에서 다루지 않는 사건의 경과가 궁금하거나, 어렴풋이 아는 역사에 대한 보다 나은 기록과 고찰을 원한다면 위 링크들로 주저없이 다녀오시라.)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이 발행한 리플렛이다. 총여학생회 관련 질문들에 상세히 답하고 있다. 요약은 다음과 같다. 총여학생회는 1988년 여학생들의 자발적 결성으로 시작됐다. 여성 혐오, 폭력, 차별에 맞서왔으며, 현재도 학내 성평등 문화 구축에 앞장서고 있다. 오해와 달리 인권축제 '다시만난세계'는 총여학생회가 아닌 독립적인 기획단이 주최했으며, 은하선 작가의 강연에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성평등적 질서에 대한 반발, 즉 백래시에 해당한다. 강연자와 총여학생회에 대한 비난과 혐오적 발언, 물리적 위협이 행해진 바 있다. 총여학생회 재개편을 둘러싼 논란은 서명 운동으로 시작해 중운위의 총투표 결정으로 이어졌는데, 1차 총투표는 대다수 남학생의 찬성 속 여학생 투표율은 낮았다. 투표 자체가 총여 회원의 자치권 침해로 비판받았으며 TFT팀의 재개편 노력은 주목받지 못했다. 추진단은 사실상 총여 폐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는 총폐위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의 당선은 여학우들의 신뢰를 보여주었으나, 총여 폐지를 위한 2차 총투표가 이어져 총여의 자치권은 다시 한번 훼손되었다. 총학생회칙에서 조항이 삭제된 이후에도 총여학생회는 독립 자치기구로 활동을 계속했다. 중운위는 이 조치가 회칙 개정에 해당하지 않으며, 총투표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치단체를 없앨 권한이 없음을 인정했다. 총여학생회는 여성의 날 행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불법촬영기기 탐지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학교 측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했다. 2020년 3월 12일, 총학생회의 총여학생회실 강제 철거 시도가 있었다. 총여실이 서재, 불법 촬영 탐지기 대여실, 성폭력 지원 공간 등으로 활용되어 필요성이 컸으며, 총여학생회와 총학생회는 독립적인 단체로 서로의 공간을 철거할 권한이 없다. 총여실은 학생 인권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이 공간의 논의와 사용은 소통과 협업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이 발행한 리플렛이다. 총여학생회 관련 질문들에 상세히 답하고 있다. 요약은 다음과 같다. 총여학생회는 1988년 여학생들의 자발적 결성으로 시작됐다. 여성 혐오, 폭력, 차별에 맞서왔으며, 현재도 학내 성평등 문화 구축에 앞장서고 있다. 오해와 달리 인권축제 '다시만난세계'는 총여학생회가 아닌 독립적인 기획단이 주최했으며, 은하선 작가의 강연에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성평등적 질서에 대한 반발, 즉 백래시에 해당한다. 강연자와 총여학생회에 대한 비난과 혐오적 발언, 물리적 위협이 행해진 바 있다. 총여학생회 재개편을 둘러싼 논란은 서명 운동으로 시작해 중운위의 총투표 결정으로 이어졌는데, 1차 총투표는 대다수 남학생의 찬성 속 여학생 투표율은 낮았다. 투표 자체가 총여 회원의 자치권 침해로 비판받았으며 TFT팀의 재개편 노력은 주목받지 못했다. 추진단은 사실상 총여 폐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는 총폐위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의 당선은 여학우들의 신뢰를 보여주었으나, 총여 폐지를 위한 2차 총투표가 이어져 총여의 자치권은 다시 한번 훼손되었다. 총학생회칙에서 조항이 삭제된 이후에도 총여학생회는 독립 자치기구로 활동을 계속했다. 중운위는 이 조치가 회칙 개정에 해당하지 않으며, 총투표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치단체를 없앨 권한이 없음을 인정했다. 총여학생회는 여성의 날 행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불법촬영기기 탐지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학교 측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했다. 2020년 3월 12일, 총학생회의 총여학생회실 강제 철거 시도가 있었다. 총여실이 서재, 불법 촬영 탐지기 대여실, 성폭력 지원 공간 등으로 활용되어 필요성이 컸으며, 총여학생회와 총학생회는 독립적인 단체로 서로의 공간을 철거할 권한이 없다. 총여실은 학생 인권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이 공간의 논의와 사용은 소통과 협업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사진1.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 리플렛

출처: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는 2020년 3월 21일, 총학생회의 총여학생회실 강제 철거 시도 당시 총여학생회 측에서 직접 발행한 리플렛 자료가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불어, 위 ‘좋은 글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뾰족하고 새로운 분석을 이 단문에 담을 자신은 없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뒤늦게나마 할 일은 ‘이후’를 짚어내리는 것이다. 2019년도 1월의 ‘민주주의’, 즉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폐지 및 총여관련 규정 파기, 후속기구 신설의 안’이 가결된 학생총투표 이후에는 무엇이 남았는지. 그래서 대학 페미니즘의 영역을 ‘현재된 가치’로 되새기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그 흐름에 발을 담그면 되는지. 오늘부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폐지 당시에도 계속 이야기했어요. 이번 대의 총여가 잘못을 하고 있거나 총여라는 것의 구조에 불만이 있다면, 사퇴를 요구하고 어떤 문제를 고쳐야 하는지 논의하면 되는데. ‘너네 잘못했으니까 없어져!’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총학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면 비대위를 세워서 대응하든가 하잖아요. 총여를 없앤 건 너무 큰 비약이었어요.” (전 <PRISM> 구성원 모모)

 

역사 상 학교에 존재한 가장 거대하고 강한 여성공동체에 무수한 바늘이 달려드는 상황이었다.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은 말살 속에서 탄생했다. “멸망을 막기 위해” 정후보, 부후보, 선거본부장 셋이서 자취방에 모여, 떡볶이와 냉동 애플망고를 먹으면서 어떻게든 밤을 새어 선거를 준비한 기억이 있다고 모모는 증언했다. 당시 초면에 가깝던 세 명이서 첩첩산중 속에 단 한 가지 대의를 품고 맨땅에 헤딩을 하는 상황이었다고. “가라앉는 배인 줄 알고 탔으면서도” 당선이 결정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도 멈추지 않는 뜀박질을 <PRISM>은 계속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이라는 문구가 가장 크게 적혀 있고, 그 아래 2019 총여학생회 부스 행사. 3월 7일 신촌 백양누리. 3월 8일 송도 와이플라자라고 적혀 있다. 포스터는 파란 배경에 남색 리본이 흩날리고 있고, 중앙에 고개를 젖힌 여성의 얼굴 안에 얼굴 대신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들어가 있다. 총여학생회의. 여성해방운동. 반성폭력. 여학생부. 역사.
2019 제3회 인권축제 -EVER!라는 문구가 중앙에 있다. 포스터는 연두색 배경에 흰 빛을 연상시키는 효과와, WHOEVER, WHENEVER, WHEREVER, FOREVER이라는 흰색 글씨가 눈에 띈다. 그 아래에는 행사 날짜와 주최 단위가 적혀 있다.
 EMPOWERING: 여성주의에 힘을. 이라는 문구가 상단에 있다. 카드뉴스 배경은 까맣고, 희고 얇은 라인 여러개로 배경이 디자인되어 있다. 텍스트 박스 안에 이런 문구가 있다.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가 세상을 다시보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시작한 지 4년째가 되어 갑니다. 작년은 대학 내 여성주의자들에게 매우 혹독한 한 해였습니다. 총여학생회 폐지 바람을 타고 공동체 내 백래시가 거세졌고, 페미니스트들은 실질적인 폭력에 대한 위협 아래에서 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에 PRISM은 대학 내 여성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EMPOWERING이란 주제로 세다페 강연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여성의 활동을 가시화하고, 학내 페미니스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본 행사의 목적입니다.
세상을 다시보는 페미니즘. EMPOWERING이라는 문구가 상단에 있다. 카드뉴스 배경은 까맣고, 희고 얇은 라인 여러개로 배경이 디자인되어 있다. 중앙에는 2019년 5월 8일부터 5월 10일까지.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The 4th Feminism Vision: EMPOWERING이라고 적혀있다. 맨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제30대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PRISM이라고 적혀있다.

사진2, 3, 4, 5. 3.8 여성의 날 행사 포스터, 2019 제3회 인권축제 <-EVER!> 포스터, 제4회 세상을 다시 보는 페미니즘 행사 홍보 카드뉴스

출처: 연세대학교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 페이스북

대학 공동체 간 유대가 전반적으로 약해진 상황, 예산 말고는 남은 자원이 거의 없던 때의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성과다. “우리는 여성에 의해 뽑힌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임기를 마치겠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제3회 인권축제 <-EVER!> 개최, 제4회 <세상을 다시 보는 페미니즘> 개최, 불법촬영기기 탐지기 상시 대여, 3・8 여성의 날 부스 전시를 비롯한 풍성한 활동을 해냈다.(주2) 학내 페미니즘 동아리 <페스포트>(구 <고양이 발바닥>)를 비롯한 학내 여성주의자들의 연대 또한 큰 힘이 되었고, <PRISM> 이후 모모가 학내 여성주의 활동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주2) 더 많은 활동내역을 <PRISM> 공식 인스타그램페이스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선 후 2018년 겨울방학이 공격이 뜸했던 시기였고, 총여실도 비니까 할 일이 없다면 총여실에서 놀자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겨울교육협동조합’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무언가였는데(...) 초중고 학교처럼 시간표를 짜서 낮에는 과목을 하나씩 담당해 시를 읽고, 그림 그리고, 요가 하고, 과학 강의를 해주는 등의 시간표를 짰고요. 점심시간이 3시간이었는데 거기서 함께 요리를 해먹었어요. 재료도 사오고 냉장고도 있어서 그걸 쓰면서 지냈는데, 물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해야 하긴 했지만… 그렇게 겨울 방학을 보내면서 사람들끼리 서로 챙길 수 있었고 친밀감도 많이 생겨났어요. 너무 빨리 소진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이벤트들이 있었죠.” (모모)

 

<PRISM>을 매 순간 일으켜 세운 원동력은 공동체의 힘이다. ‘교육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평균 6명의 활동인원이 동고동락하는 생활문화를 탄생시킨 게 그 대표적인 예시다. ‘겨울교육협동조합’은 ‘여름교육협동조합’으로 이어져, 서로에게 일상적으로 돌봄과 애정을 제공하고 때로는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친밀감을 북돋아 장기간의 소진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때로 범죄의 형태로까지 나타나는 익명성 뒤의 수많은 칼날과 바늘 앞에서, 소수가 뼈와 살을 헌신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활동을 위한 에너지는 닳는다. 개인의 내부에서 이 에너지를 마치 무한동력처럼 굴리고 발산하는 건 단연 불가능하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이것이 몇배, 몇십배로 불어나 관계망 사이를 잇고 또 순환할 수 있다.

나무 책상 위에 크레파스와, PRISM 방명록이라고 크게 적힌 작은 스케치북이 있다. 그 아래 공룡 그림과 무지개 그림을 비롯한 다양한 글씨의 방명록이 적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리즘 만세. 자치공간 활용도가 정말 짱이에요. 이게 학생회지. 짱 깨끗해요. 고등학교 야자실 느낌 나서 공부가 잘 되네요. 저는 왜 안 될까요? ㅋㅋㅋ 나 프리즘 사랑해. 하트. 열람실 최고인데 제 집중력은 여기서도 바닥이네요. 웃는 이모티콘. 정서적 안정감만 듬뿍 얻고 갑니다. 내일은 부디 제가 열공했으면 좋겠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6월 11일. 1빠로 왔어요. 6월 12일. 하트. 너무 예뻐졌어요. 하트. 청소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것 같아요. 우는 이모티콘. 언제나 응원하고 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진6. <PRISM> 방명록

출처: 연세대학교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 페이스북

시험기간, <PRISM>이 총여학생회실을 독서실로 만들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한 ‘릴레이 공부하기 행사’의 앙증맞은 방명록이다. 주최자와 참여자가 서로에게 힘과 온기를 얻어갈 수 있는 따뜻한 메세지가 가득해, 여학생 휴게실 문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여학생 휴게실이 ‘따뜻한 온기가 있는,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익숙한 공간이었으면’ 했던 여휴만만 또한 이 그림을 보고선 흐뭇한 미소를 지어주지 않을까.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32년의 족적> 전시 포스터 배너들과 기록물이 놓인 여러 의자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늘어서 있다. 포스터는 짙은 남색이다.

사진7.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32년의 족적> 전시

출처: 연세대학교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 페이스북

<PRISM>은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32년의 족적>에 대한 전시와 총여학생회실에서의 마무리 파티를 하며 활동을 끝맺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소회를 밝히는 모모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미련이나 군더더기 같은 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눈에 띄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총여학생회라는 풍선 한 무더기가 여전히 그 색을 잃지 않고 학내를 거닐었다는 것이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든 여성자치단체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여운은 깊으나, 이들이 결코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또다시 그리고 끝없이, 이러한 종류의 풍선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기력을 가지고 있다. 여성주의라는 하나의 뜻을 기저에 두고 의미와 가치를 끌고 당기며 속속들이 뭉친다.

그리고 2024년 3월, 제4회 인권축제의 이름으로 백양로를 떠도는 여餘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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