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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에
여성주의가 필요해?

편집자 야자수🌴

총여학생회의 여성노동운동과

노학연대단체의 탄생

 

지난 2월, 결국 연세대학교 재학생이 청소⋅경비등 학내 시설관리 노동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는 기각되었다. 2022년 상반기 연세대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은 교내 학생회관 앞에서 시급 인상, 샤워실 설치, 인력 확충을 요구하는 쟁의행위를 했지만, 재학생 이 씨는 집회 소음에 대한 수업료와 정신과 치료비로 638만원을 달라며 손해배상청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법원은 미신고 집회더라도 정당한 쟁의 행위인 경우와 소음정도가 직접적인 학습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밝히며 이를 기각했다(주1).

 

IMF 경제위기 직후, 학내 여성자치단체는 비교적 해고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노동권에 집중해 오며 노동연대를 진행했다. 1998년 노학연대 학생 모임 ‘살맛나는 세상’이 발족되었다. ‘살맛나는 세상’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여성 노동권 확보와 성적 차이의 윤리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과 단위들의 모임이다. 이 단체는 평소에는 소식지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이와 함께 노동절 행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기획했다(주2). 이후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2000년~2003년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전개했다. 2001년도와 2002년도에 메이데이(노동절) 행사 <여/聲> 개최, 대학내 여성 노동 대토론회 참여, 여성 노동권 쟁취를 위한 대학 내 여성주의자 연대 ‘맷돌굴리기(연대총여학생회, 관악여성모임연대, 살맛나는 세상)’ 참여, 여성 노동자 다큐 <밥꽃양> 학내 초청 상영, 토론회 ‘3.8 노무현 여성정책 어떻게 볼 것인가’ 개최 등을 진행했다(주3).

 

본격적으로 학내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연대한 것은 2008년부터다. 그전까지 서울 대부분의 대학에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민주노총 분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연세대 시설관리 노동자 조직 과정에서 연세대 학생 모임 ‘살맛’이 큰 역할을 하였다. ‘살맛’은 학내 주요 주체인 학생회, 학보사, 운동단위 등이 모여 구성된 학내 노동운동 단체다(1998년에 발족된 ‘살맛나는 세상’과 어떠한 유관성이 있는지는 명문화된 문서가 없다). 살맛 모임 학생들은 대학축제부스에 30여명의 노동자들을 초대하여 신뢰를 형성하거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률 관련 소식지를 제작해 일상 속에서 노학연대를 이루었다. 이런 방식으로 살맛은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 연세대 분회가 생길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이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 김종진은 학생자치단체가 주체가 되어 노동조합을 조직화한 연세대 사례는 노조(부산대)나 노동자(청주대, 성신여대, 덕성여대)가 주도해서 조직화한 사례와 다르다고 꼽았다(주4). 이후 비정규직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청활과 선전전을 같이 진행하는 등 노학연대를 이어나갔다.

 

학내 여성자치단체는 연세대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노학연대를 참여했다. 제26대 총여학생회 <다시 봄>은 2015년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기숙사 청소 경비 노동자 집단해고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하거나, 제29대 총여학생회<모음>은 2018년도 여성의 날 행사로 학내 시설관리 노동을 중심으로 개최하여 직접 연세대학교 청소 노동자와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근데 꼭 학내시설관리노동자의 권리증진을 위해 여성주의가 필요해?

 

총여학생회는 단순히 ‘중년여성들이 노동하기 때문에’ 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성별 자체에만 집중했다기보다는, 더 나아가 여성주의의 언어로 노동운동을 하고자 했다.

 

과거부터 각종 자료집과 자보를 통해 ‘진보’의 영역인 노동운동 문화도 남성중심적으로 운영되어 왔음을 비판했다. 2006년 제18대 총여학생회 <여기, 열다>가 발간한 자료집 내에서 기존의 노동운동이 남성중심적으로 이뤄져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주5).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은 조직의 위상에 타격을 주지 않는 한에서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인정’될 뿐이고, 청소 용역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동지’가 아닌 ‘어머님일 뿐이다. 집회 현장에서 남성 노동자들에게 ‘어디 젊은 여자가’담배를 피우냐고 비난받았던 것이, 동지는 간데없고, 노동 ‘형제들’의 깃발만이 나부꼈던, 그런 기분을 경험한 것이.”

 

연세대학교 20대 총여학생회의 자보 <여성주의자로 연대하기>에는 ‘삶의 맥락’이 다른 여성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워나가는 내용이 적혀있다. 어쩌면 20대 대학생이 중년의 여성과 함께 노동운동한다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한 평범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 자보는 대뜸 무작정 투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소외받는 이들이 없으며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여성주의로서 투쟁하자고 말한다.

 

자보 전문 중 일부를 인용한다.

 

자보 <여성주의자로 연대하기>

제목은 거창하지만 이 짧은 글로 “어떻게” 여성주의자로 연대할 수 있는지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의 맥락에 따라 연대하는 지점은 다양하다.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는 끊임없이 여성주의로 소통하며 주체들이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올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짧은 경험을 공유하고 같이 여성주의적 연대를 고민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처음 만나도 관계를 맺으면서 어려웠던 지점은 “사오십대 여성노동자들과 대학생인 나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할까?”였다. 나의주의가 막강한 이 사회에서 그 나이대의 여성과 대학생이 맺는 관계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안 친하면 그냥 대학생-아줌마, 친하면 어머니-아들/딸이 경험할 수 있는 관계의 대부분이다. 동지나 같이 싸워나가는 친구로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똑똑한 학생들’이란 오해도 서로의 생각을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 사회에서 그녀들을 억압하면서 만들어놓은 온갖 장벽들을 내가 깨기에는 막막했다. 결국 그녀들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삶과 노동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과, 끊임없이 여성주의로 대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로의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본가를 위한) 법과 재력, 책임 미루기 쉬운 관료제를 보유한 학교와 싸우는 과정은 지난하고 열 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자주 욕설이 나오곤 한다. 가부장제에서 만들어진 욕설 중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가진 것들이 있고, 그런 욕설을 통해서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배워온 사람들에게 “무조건” 그런 욕설을 쓰지 말자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욕에 담긴 뜻을 이야기하고, 이런 욕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되도록이며 사용하지 말자도 이야기 해야할 것이다.

(...)

여성을 성적을 대상화하거나, 이성애중심주의,성별에 기반한 고정관념,나의주의,남성중심적인 문화-이런 것들은 이 사회와 마찬가지로 투쟁의 현장에도 어느 순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우리를 위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나만을 위한 문제제기가 될까봐 걱정되었고, 그녀들의 투쟁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가 그 지지를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질까봐 가슴 졸였다. 삶의 맥락이 다른 상황에서 어떠한 언어로 어떻게 소통해야 오해가 없을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긴 시간을 두고 더 많은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이 자신의 삶에서 여성주의로 자신의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많은 자원과 연대하는 과정에서의 상상력,힘들겠지만 이끌어나가고자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예전에 이랜드 투쟁에서 비혼인 여성관리자에게 여성노동자들이 “노처녀가 히스테리 부린다”며 관리자의 노동자 탄압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때 “노동자를 탄압한 것은 ‘노처녀’서가 아니라 자본이 만들어 놓은 관리자라는 위치 때문이다”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다음 구호를 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 쉽고 빠르게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투쟁하고 연대하는 주체들 사이에 끊임없는 소통과 이해를 통해 같이 모든 억압들에 하나씩 하나씩 저항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들의 억압을 여성주의로 이야기하고, 나의 억압을 여성주의로 이야기하고, 그 여성주의가 만나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연세대학교 20대 총여학생회 성큼 다가서는 일상의 여성주의 <틈을 누비다> 의 ‘여성주의자로 연대하기’ 중에서

 

자보의 제목을 읽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과 연대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주의로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학내 구성원과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을 담은 솔직한 글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삶의 맥락이 다른 사람과 연대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걱정이 있다. 또한 여성주의적 언어로 노동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문제의 현상을 색안경끼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게 한다. 위 전문에서 이랜드 투쟁 문제의 핵심을 ‘노처녀의 히스테릭’이 아닌 ‘권력관계’로 설명해내는 것처럼. 여성 노동자들에게 “선생님, 이 문제의 핵심은 노처녀의 히스테릭이 아니라 관리자라는 위치입니다”라고 말하기 까지는 투쟁 동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할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관계 속에 놓여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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